2022 ACT 예술 인문학 특강 제 6강
- titledlady737
- 2023년 5월 13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3년 6월 24일
강사 : 김예경

현대 디자인의 탄생(영국편)
아르 누보 양식이란 ?
'신미술'이라는 뜻의 미술사 및 미술 비평용어로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서 유럽 전역에 넓게 퍼졌던 장식적 양식을 일컫는다 아르누보는 나라마다 제각기 강조하는 방식이나 부르는 명칭이 조금씩 달랐는데 프랑스와 벨기에에서는 ‘아르누보’, 영국과 러시아, 미국에서는 ‘모던스타일(신미술)’, 독일에서는 ‘유켄트 슈틸’, 오스트리아에서는 ‘제체시온 스틸’, 바로셀로나에서는 보다 광범위한 ‘모데르니스타 ‘운동의 일부로 알려졌으며 이탈리아에서는 새로운 미감을 선도했던 런던의 리버티 상점에서 이름을 따온 ‘스틸레 리베르 티’ 라고 불렸다.
19세기 대부분의 미술사조가 파리에서 일어난 것과 달리 ‘아르누보’의 진원지는 영국에서 찾을 수 있다. 작가 이자 미술 평론가인 존 러스킨은 그의 저서 <베니스의 돌>에서 “모든 아름다운 미술 작품은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자연의 형태를 닮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예를 포함한 미술에서 기계적 대량생산을 거부하고 미술로서 사회개력을 부르짖는 러스킨의 디자인 개혁운동은 그의 제자였던 디자이너이자 화가, 사회주의자인 윌리엄 모리스가 주도한 ‘미술 공예 운동, arts and crafts movement’ 에 의해 더욱 구체화 되었다. 1860년부터 모리스는 산업발전의 가속화에 반발하여 중세의 장인 체제에 기반한 전통 공예기술의 부활을 장려하였다. 이른바 고딕 부활운동에 토대를 둔 미술 공예운동을 장려하였다.
존 러스킨(영국 1919-1900)

l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저명한 예술 평론가이자 작가. 소묘 및 수채화가로도 활동했으며, 사회사상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평론은 예술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건축, 문학, 교육, 경제학, 지질학에 이르는 방대한 주제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l 러스킨의 서술 방식과 문학 형식 역시 다양한데 그는 수필과 논문, 시와 강의, 여행안내서와 설명서, 편지와 동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의 글을 썼다. 또한 그는 바위, 식물, 새, 풍경과 건축물 그림과 섬세한 스케치, 장식품 등을 만들기까지 했다. 저술 전반에 걸쳐 그는 자연, 예술과 사회의 연관을 강조한다. 오늘날 러스킨의 사상은 생태주의와 지속가능성, 공예에 대한 관심과 함께 크게 인정받았다.
l 러스킨은 윌리엄 터너의 작품을 옹호하는 방대한 양의 수필<근대화가론>1부로 인하여 크게 주목을 받았고 이 수필에서 그는 예술가의 주된 역할이 ‘자연에 대한 진실’이라고 논하였다. 제2권 (1846)을 쓰기 위하여 이탈리아에 갔을 때, 북이탈리아 미술과 건축에 감동, 『건축의 일곱개 램프(The Seven Lamps of Architecture)』(1849)를 써서 명성이 높아졌다. 『베니스의 돌(The Stone of Venice)』(1851)에 의하여 미술과 건축은 민중의 종교, 도덕, 민족적 이상, 사회적 습관이라는 그의 예술철학을 확립하여, 북 이탈리아 중세 후기 예술가와 공장(工匠)의 생활과 제작태도를 이상적인 것으로 보았다. 1850년대부터 러스킨은 자신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라파엘 전파를 옹호했다
l 1869년 러스킨은 옥스퍼드 대학의 첫 미술 교수가 되어 그곳에 ‘러스킨 스쿨 오브 드로잉’을 세웠고 1871년 ‘영국의 노동자와 직공에게 쓰는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러스킨은 이 복잡하고 인간적인 작품을 쓰며 자신의 이상사화에 기초가 될 강령들을 면밀히 생각했다. 그 결과 그는 오늘까지 남아 있는 단체인 성조지 길드를 창설한다.
l 1884년 은퇴하여 브랜트우드에 거주했다. 그의 건축에 대한 저서는 일반인들에게 건축에 대한 관심을 높여, 그 사회적 관심은 윌리엄 모리스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빅토리안 고딕의 유행과 아트 앤드 크래프트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l 건축가는 아니었으나 건축이 주축이 된 미학 사상과 기독교 사상을 통해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결과적으로 건축 분야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 ‘러스킨 고딕’이라는 경향을 탄생시켰고 성기 빅토리안 고딕을 정신적으로 이끌었다.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터너의 낭만주의와 라파엘전파의 중세주의 등 예술에 깃든 순수 이상에서 찾는 작업을 평생 벌였다.
l 러스킨은 자신의 작업에서 건축이 갖는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미술에서 찾은 예술 이상을 건축에 적용시켜 [건축의 일곱 등불(The Seven Lamps of Architecture), 1849] 등 여러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 영국 사회에 필요한 이상적 건축 모델을 베네치아 중세 기독교 건축에서 찾으면서 [베니스의 돌(The Stones of Venice), 1853]을 출간했다. 베네치아 고딕 건축은 구조 기술을 중심으로 수직선을 추구했던 프랑스나 독일과 달리 나지막한 수평선을 유지했으며 색채, 미술적 요소, 휴먼 스케일, 흙의 본질 등을 추가적 특징으로 가졌다. 이런 특징들은 중세 기독교 정신이 배어든 결과이며 이것이 물질주의에 찌든 19세기 영국 사회에 등불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l 빅토리안 고딕(고딕 리바이벌)의 성립
영국의 고딕 리바이벌을 빅토리안 고딕으로 부른다 1837년~1901년의 무려 64년을 통치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딴 명칭이다. 영국은 당시 산업 혁명의 폐해에 대한 대안 운동으로 중세 정신에 기대는 경향을 나타내면서 미술 공예운동, 라파엘 전파 운동, 퀸 앤 리바이벌, 올드 일글리시 스타일 등 다양한 하부운동을 거느렸는데 빅토리안 고딕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중세 주의의 하부운동가운데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과 결부되어 퓨진과 러스킨이 이끈 건축운동이다. 산업혁명의 결과 기계문명이 도래하고 부의 축척이 진행 되면서 자본주의도 발전했으나 그 폐해는 점점 심해가면서 정신적 사회적 문제가 위험 수위에 달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대안 운동으로 기독교 사회주의가 등장하였고 이는 기계문명에 대한 대안으로 중세 카톨릭 부활을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으로 사회주의를 결합한 운동이다. 카톨릭 부활, 기독교 개혁, 사회 개혁 등 다양한 운동을 전개하였고 건축도 중요한 분야여서 19세기에 맞는 새로운 교회유형을 찾는 ‘전래 건축 캠페인을 벌였고 그 내용은 <교화 건축학 지침서>로 정리되었다 두단계로 진행하였는데 첫번째(1844-47)는 오거스트 퓨진이 두번째(1850-56)는 러스킨이 이끌었다.

오거스크 퓨진이 남긴 건축물(빅토리안고딕) 런던 국회의사당 : 고딕양식가운데 수직양식을 리바이벌함

옥스퍼드 대학박물관
토마스 딘(Thomas Deane) 벤자민 우드워드(Benjamin Woodward) 1855 ~ 1861 19세기건축 영국 옥스포드
러스킨의 교훈에 당시 첨단공법이었던 철물건축을 혼합한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실내는 산업화의 비인간화에 맞서 장식과 디테일의 힘을 보여준다
윌리엄 모리스(1834-1896) 현대 디자인의 아버지

윌리엄 모리스

가브리엘 로세티가 그린 제인모리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예술학을 전공하였으며 존 러스킨의 영향으로 수공예를 선호하는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산업 혁명기에 대량 생산된 제품의 저질화 현상과 노동의 즐거움을 앗아간 기계를 비판하고 미술 공예 운동을 주도하였다.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아르누보, 독일의 유겐트슈틸 운동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가 있다. 1861년 모리스 마샬-포크너 상회를 설립해 수준 높은 실내 장식을 선보이는 한편, 켈름스코트 출판사를 통해 인쇄와 서적 디자인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윌리엄 모리스가 활동하던 당시 그와 그의 친구들은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s)라 불리는 양식의 그림을 주로 그렸다. 모임의 이름이기도 한 라파엘 전파에는 가브리엘 단테 로세티, 에드워드 번-존스, 윌리엄 헌트 등이 포함돼 있었으며 당시의 화가, 비평가, 시인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라파엘 전파는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일어난,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화가인 라파엘로 이전 양식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복고주의와 과학적 눈으로 현실을 재현하려는 사실주의를 동시에 지향한 그룹이자 사조이다. 이들 대부분은 그림 위주의 활동을 하며 당시에 유행했던 학구적인 예술에 반해 일어난 예술 운동에 매료된 작가들이었다. 하지만 윌리엄 모리스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보다 실용적인 예술로서의 디자인 분야에 더욱 골몰하게 된다. 그가 주도한 미술공예운동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모든 것이 기계화되고 대량생산됨에 따라 생활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문제 제기를 통해 과거의 장인정신을 부활시켜 가구, 벽지, 커튼 등 생활 속의 공예품을 직접 손으로 제작하는 움직임을 일컫는다. 그의 이러한 운동은 훗날 독일로 건너가 바우하우스(Bauhaus) 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친구 가브리엘 단테 로세티의 그림모델이기도 한 아름다운 여인 제인 버든과 결혼한 모리스는 자신의 꿈을 이루어 줄 신혼집을 친구들의 도움으로 완성하게 된다. 이는 나중에 ‘레드 하우스’라고 불리는 윌리엄 모리스를 대표하는 집이 된다. 건물은 친구였던 건축가 필립 웹이 지었고 모리스와 예술가 친구들이 협력하여 집 내부와 외부를 장식하였다. 그는 레드 하우스에서 예술 작품을 만들고 그의 사상과 예술 행위를 영위하는 터전을 만들고자 하였다.


윌리엄 모리스는 현대 디자인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의 사상과 실천은 근대 디자인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랬던 그가 말년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은 책이었노라고 고백하고 나이 56세에 켐스콧공방(Kelmscott Press)를 연다. 이 시절 모리스는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활자체라 생각하고 중세의 글꼴을 모범으로 하는 새로운 글꼴을 만들어 책 자체가 예술작품이 되는 책 만들기에 몰입하였다. 이 예술 책들 중 가장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은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의 작품집이다.

제프리 초서 작품집


모리스가 디자인한 벽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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