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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act 예술인문학 특강 제7강

최종 수정일: 2023년 6월 24일



강사 : 김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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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문 13세기 - 17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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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반니 디 메디치(1360-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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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디 메디치는 대규모로 모직을 수입해 정제 염색한 후 수출하는 것으로 부를 축척하였으며 그렇게 모은 자금으로 금융업에 진출, 로마, 베네치아, 제노바, 나폴리 등에 지점을 둘 정도로 피렌체에서 가장 번창한 은행가가 되었다. 당시 부유한 상인이라면 피렌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의무였던 시기라 1421년 최고 행정관 자리를 수락하였으나 정적들의 표적이 될 만한 일은 경계하였고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처신해 시민들의 민심을 얻음




2.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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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막대한 재산과 사업수완을 물려 받았으면서 겸손과 예술을 사랑하는 기질도 함께 물려 받음, 부친의 말대로 자선사업에도 적극 참여하였고 마키아벨리는 그를 가리켜 “중후하고 예의 바르고 덕망 넘치는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메디치가의 은행업은 계속 번창하여 유럽 10여개의 도시에 지점을 설치해 금융업의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이를 관리 하기위해 복식부기를 도입하였고 회계사를 고용해 과학적인 금융업과 기업경영을 추구하였다.

메디치은행이 유럽왕들이 벌이는 전쟁에 돈을 대주고 이권을 따내 막대한 부를 축척하고 영향력을 확대하였는데 이 때문에 피렌체의 유력가문들에의해 반역죄로 몰려 1433년 피렌체에서 추방당했다가 1434년 9월 피렌체로 돌아와 최고 행정관이 된다.

코시모는 군주의 칭호도 없고 호화로운 생활도 하지 않았지만 실질적인 군주였다. 피렌체 사람들은 평화와 전쟁을 결정하고 법을 통제함으로써 사실상 왕의 역할을 하는 그를 ‘무관의 제왕’으로 받아들였다.

코시모는 계급이 아니라 능력위주의 인재를 등용하였고 막대한 자금을 들여 예술과 학문을 부흥 육성하였다.

그 시절 그리스 학자들이 피렌체에 대거 모여들면서 고전 철학과 역사, 미술 등에 대한 흥미가 촉발하였는데 특히 플라톤 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코시모는 플라톤 연구를 위해 ‘아카데미아 플라토니카’를 창설하고 고전학자를 초빙하였고 이 학문 연구소는 아카데미아의 부활이자 르네상스의 본격적인 태동이었다.

코시모는 유럽각국에 사람을 보내 고서와 귀중본 등의 장서도 수집하였는데 고대 그리스나 히브리어, 아랍어 문서는 당시 유럽의 공용어인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1443년 산 마르코 수도원 내부에 메디치 도서관을 만들어 고문서 장서들을 분류 보관하고 이를 일반에 공개하였다. 메디치 도서관은 곧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조반니와 코시모 부자는 문화와 예술을 지원하면서도 기독교와 성당에 각별히 관심을 가졌고 피렌체 인근의 성당과 수도원 복원에 거금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산마르코 수도원이 복원 증축되고 메디치가 궁전이 새로 지어졌으며 피렌체 두오모 성당의 돔이 완성되었다. 아버지 조반니는 두오모에 청동제 대문을 설치하였다.

이 당시 고리대금업은 지옥으로 통하는 직업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금융업 종사자들은 성당을 위해 돈을 쓰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는 교황의 말 때문에 코시모도 피렌체의 산마르코 수도원을 교황에게 바쳤다.



3. 페에로 데 메디치(1416-1469)

코시모의 장남이지만 5년만에 숨짐




4.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 ‘위대한 로렌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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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모의 손자이자 피에로의 아들로 20세에 아버지의 권한을 물려 받고 머지않아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을 최고 정점에 올려 놓는다. 메디치가를 눈에 가시로 보는 파치가가 교황 식토스 4세와 짜고 1478년 메디치 수장들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지만 쿠테타는 실패하였고 이때 관련자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암살범의 처형장면을 스케치로 남겼고 보티첼리는 반역자들이 목에 밧줄을 건 죽은 모습을 바르젤로 미술관 벽에 남겼다.

로렌초는 이때 살해된 동생 줄리아노의 이름을 자신의 셋째아들에게 물려주었고 이 줄리아노가 석고 데생의 가장 유명한 모델인 줄리앙 석고의 원 조각상인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줄리아노상’이고 현재 산 로렌초 성당내 메디치 예배당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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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살해된 줄리아노의 유복자가 훗날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1523-1534)이다.

쿠테타에 실패한 교황은 로렌초를 추방하지 않으면 성무금지 처분을 내리겠다고 피렌체 정부에 통보하였지만 피렌체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나폴리와 연합한 교황이 피렌체까지 쳐들어오자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피키가 사람들을 풀어주는 대신 나폴리와 동맹이 된다.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후 1484년 식토스 교황 4세가 죽고 이노첸시오 8세가 새 교황으로 즉위하면서 로렌초와 교황 간의 갈등은 막을 내린다.

로렌초의 주 관심사는 인간을 위한 문화 예술활동의 지원이었고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철학과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저택 마당에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상을 그러모아 피렌체 예술가들에게 실습재료로 활용하게 하였는데 이때 이곳에 매일 드나들면서 조각작업을 하던 미켈란젤로가 로렌초의 눈에 들어오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로렌초의 지원을 받았고 이때 로렌초의 지원으로 피렌체의 르네상스 문화는 최고조에 달한다.




5.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1472-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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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 아들인 피에로는 ‘위대한 자’로 불렸던 아버지와 달리 ‘불행한 자’로 물렸는데 이는 프랑스왕 샤를 8게의 침입을 받아 1494년에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공화국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이 떠나고 피렌체는 도미니크회 수도사 사보나롤라가 통치하였는데 그는 회개와 금욕위주의 신정정치를 구축하였다. 이 과정에서 비과학적인 이적과 예언을 남발하다가 군중의 불신을 자초해 1498년 화형당하였다.




6. 줄리아노 2세 데 메디치(1479-1516) 로렌초 2세 데 메디치

1512년 8월 메디치가의 복귀을 요구하는 스페인군의 피렌체 포위 후 이루어졌고 로렌초의 셋째 아들인 줄리아노 2세 데 메디치가 메디치 가문을 대표하였다.

이 가운데 조반니가 1513년 3월 레오10세 이름의 교황으로 즉위함으로써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은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러나 곧 줄리아노 2세 데 메디치와 피에로의 아들인 로렌초2세 데 메디치 역시 3년후에 죽음으로서 메디치가의 실세는 1523년 교황으로 즉위한 클레멘스 7세뿐이었다.





7.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1523-1534), 알렉산드로 데 메디치(1510-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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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스 7세는 갖은 술수로 1532년 피렌체의 공화제를 폐지하고 자신의 서자인 알렌사드로 데 메디치를 피렌체의 통치자로 임명한다. 알렉산드로는 아버지를 믿고 폭정을 일삼다가 27세에 암살당한다. 이로서 약 190년간 이어져온 메디치 가문의 장자 계열의 후손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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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당하는 알렉산드로 공작





8. 카데리나 데 메디치(1492-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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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2세 데 메디치의 딸인 카테리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흠모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자신의 아들인 앙리와 결혼시켜 앙리 2세 왕비가 외었다. 카트린으로 불린 그녀의 후손들은 유럽역사의 주역이 되었다. 아들인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는 프랑스 국왕을 지냈고 카트리나의 어린 딸 엘리지베스는 합스부르크가와 출신이면서 스페안 최전성기의 국왕인 펠리페 2세와 혼인해 왕비가 되었다.




9. 코시모 1세 데 메디치(1519-1574) .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1541-1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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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모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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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1세



장자계열의 후손이 끊어진 피렌체의 통치권은1537년 가문의 핵심에서 먼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로 넘어갔고 나폴리 총독의 딸과 정략결혼을 한다. 이때 가져온 막대한 지참금으로 아르노 강 남쪽의 피티 궁전을 매입한 뒤 왕실 건물로 재건축해 입주하였고 장남프란체스코1세 데 메디치 에게는 자신이 사용하였던 베키오 궁전을 물려준다코시모 1세는 피렌체를 강압적으로 통치하고 과중한 세금을 거둬들여 피렌체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다. 다만 예술과 과학은 선조들처럼 열심히 후원했다. 1569년 피렌체 공화국을 토스카나 공국으로 만들고 자신은 토스카나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5년후 사망한다. 이후 페르디난도 1세 코시모 2세 페르디난도 2세 통치로 이어지던 메디치 가문이 결정적으로 추락한 것은 코시모 3세 때였다.





10. 코시모 3세 데 메디치(1642-1723)

무절제한 주색잡기에 빠지고 세금을 가혹하게 거둬들여 피렌체 시민들과 유리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그를 이은 잔 가스토네가 1737년에 죽음으로써 3명의 교황과 2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한 이 위대한 가문은 300년만에 문을 닫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로 들어갔다.




11.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1667-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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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메디치가의 컬렉션은 잔 가스토네의 누나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가 상속하면서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한곳에 모일 수 있었다. 안나가 이들 컬력션을 피렌체에서 반출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정부에 기증하였기 때문이다 이 메디치가 컬력션을 복수 있는 곳이 바로 우피치 미술관이다. 그녀는 메디치가의 미술품들이 어떤 특정한 가문의 영광이 되는 것보다는 피렌체 국민의 이익이 되기를 바랬던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 대부분의 지배자들이 모은 컬렉션들이 이후의 흥망성쇠에 따라 전세계로 흩어졌다면 오직 메디치가에 남아있던 예술품들만이 ‘르네상스의 보고’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피렌체에 남을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그녀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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